한낮의 강렬한 태양빛에 커튼도 속수무책이다. 이미 환해진 방에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잠도 슬금슬금 달아나 버렸다. ‘아흑~’ 숙취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어제 밤새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던 그녀의 말이 또 떠오르기 시작한다.
‘넌 나쁜 남자가 매력 있다는 것도 모르니?’
요즘 부쩍 짜증이 늘어난 그녀가 어제 내게 내뱉은 말이다. 나쁜 남자라... 그녀에게 나쁜 남자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얼굴은 있는대로 구겨가면서 냉장고 문을 열어 냉수를 병째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식탁의자에 앉아 정답 없는 의문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나쁜 남자라... 그래 요즘 나쁜 남자 열풍이긴 하지. 하지만 얼마 없는 내 주변의 여성들은 모두 착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직 연애경험이 부족한 어린 친구들이나 나쁜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거라고 누군가는 말하기도 했었다.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결국 그녀의 말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난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TV엔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중인 미니시리즈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싸가지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당찬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소녀들의 환상을 대놓고 풀어놓은 설정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전형적인 나쁜 남자 스타일의 주인공에게 눈길이 갔다. 자기중심적인 성격에 사랑표현도 서투른 녀석은 오로지 들이대는 근성만 갖고 있을 뿐 다른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저런 마초 같은 녀석에게 끌리는거야? 아 물론 꽃미남이지...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어 샤워실 문을 열었다. 거품을 잔뜩 내어 머리를 문지르는데 이 놈의 생각은 이 와중에도 떠날 줄을 모른다. 그녀의 말에 다른 뜻이 있는거 같진 않다. 다른 이유라고 한다면 내 머리가 더 복잡해질 것 같아 솔직히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한다면 나는 착한남자? 아니, 아니다. 바보가 되어가는가. 아마도 그녀는 내가 매달리고 있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지. 내가 무언가에 소홀했던가? 아니야 아니야. 소홀했다면 나쁜 남자인거잖아. 너무 쉽게 보였나? 너무 빨리 고백한건가? 하지만 적극적인 모습이라면 드라마속의 그녀석도 그렇게 하지 않나? 마초?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끔찍해하는 모습이 마초 아니던가! 나도 모르게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내 머리에서 부글부글 끓는게 거품인지 내 뇌가 끓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I don't care, 그만 할래~’ 휴대폰에서 그녀가 나를 찾고 있다고 다급하게 알려준다. 머리에 거품이 묻은 채로 손만 대충 씯고 부랴부랴 달려나와 휴대폰을 열었다.
‘나야. 여기 시내에 볼일 보러 잠깐 나왔어. 데리러 나와’
‘아... 알았어. 나 샤... 아.. 아니 그.. 금방 갈게’
‘피곤해 빨리와’
전화를 끊고 머리는 대충 거품만 제거하고 몸은 물기나 제대로 닦는지도 모르게 튀어나와 일단 옷부터 주워입었다. 눈꼽이나 제대로 뗀건지 따질 겨를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화난 듯이 머리를 매만지며 드라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의 시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내 몸은 현관문을 열고 부리나케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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