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이면@

'그 남자 이야기'

르네상스인 2010. 3. 2. 01:09

 

 

 '이제 그만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얘기를 하려는거야?!'

 남훈의 앙칼진 목소리가 온방안을 울렸다.

 '네가 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을때까지. 아니 네가 겉으로라도 인정할 때까지 계속할거야.'

 그에 반해 차분한 현진의 목소리가 다시 그 모든 울림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시간과 공간의 균열이 이는 듯, 창 밖의 소리없이 나부끼는 나뭇잎만이 둘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이것 봐, 너와 나 사이 이런 대화가 언제 결론이 난 적이 있었어? 밤새 싸우고 또 싸우고, 몇날며칠을 싸우고도 결론이 난 적이 있었냐고?'

 '결론이 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네가 인정만하면 그뿐이야. 너야말로 아무런 논리도 일관성도 없이 언제까지 우기기만 할 생각이지?'

 '내 상황은 내가 잘 알아! 건방지게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남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주먹이라도 한대 칠 기세였다. 나뭇잎을 갖고 놀다 지친 바람이 이쪽이 더 재밌다는 듯 얼굴을 들이밀어 창문이 달그닥 소리를 내었다.

 '그래 알아, 네 일이지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하지만 너도 알고 있지 않아? 네 현 상황이 너조차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란거 그 모든 변명으로도 피할 수 없다라는거, 잘 알지 않아? 열심히 해봐야 소용없다고? 몸이 아파서 시작할 수조차 없다고? 그래서? 그래서 결국 이렇게 쓰레기같이 살겠다 이거야? 그렇게 고집만 부리겠다 이거야?!!!'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던 현진조차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창문 밖에서 달그닥 거리던 바람은 이젠 현진의 메아리가 되어 재미있다는 듯 다시 온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나보고 이 현실을 어떻게 인정하라고? 열심히 해봐야 빚은 줄어들지 않고, 내 몸은 원인도 모르게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오? 너라면 방법이 있겠니? 너라면 별다른 수가 있어?'

 '남훈아 우리 길게 보자. 당장 모든걸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차근차근 해결..'

 '그만해!! 그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일순 적막감이 흘렀다. 바람조차 숨죽이며 지켜보다 이내 남훈의 한숨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현진아.. 아무런 생각이 없는게 아니야.. 나도 고민하고 있다고. 어차피 한방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야. 그렇게 못미더우면 각서라도 쓸게. 최소 5년이야. 5년 뒤에 두고보자고.'

 '그럼 나보고 5년 동안 너 이렇게 한방만 기다리며 멍청하게 사는 꼴을 두고 보라는거야?'

 '멍청한게 아니야! 두고보라니까? 5년 뒤에 내 옆에서 넌 오히려 나를 부러워할 걸?'

 남훈은 이제 슬쩍 미소까지 보이고 있었다. 대책없는 그의 계획은 그에게 저런 미소까지 띄워주나보다. 저 상황에서도 저렇게 미소지을 수 있는, 근거없는 허풍에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이는 남훈의 저 모습에 현진은 항상 치를 떨었다. 이제 아무런 바람도 없다. 바람은 허풍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래 잘 알았다. 네 바람대로 꼭 되길 기도하마. 하지만 그 순간까지 같이 있어주진 못하겠다. 아무래도 난 이게 한계인 것 같다.... 잘 살아라. 5년 뒤... 아니 언제라도 네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

 말을 끝마치고 현진은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다시 현관문을 열고 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남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한방이라니까... 왜 나를 믿지 못하는거야... 두고봐 5년 뒤면 네가 나를 다시 찾아오겠지. 그땐 너그럽게 받아주마 키킥'

 음산한 웃음소리가 적막한 방안을 다시 울렸다. 사라진 바람이라도 다시 돌아온 것일까?...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영하의 온도에 함박눈까지 내려 길마저 얼어붙은 상태였다. 잔인하리만치 매서운 바람을 뚫고 주유소 편의점에 한 사내가 들어섰다. 편의점 직원의 못마땅한 듯한 시선이 이 사내에게 꽂혔다. 사내는 눈치를 보며 물건을 고르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정강이까지 밖에 오지 않는 낡고 헤진 바지, 다 떨어진 슬리퍼, 때 묻고 뼈마디가 불거진 맨발, 때 묻은 여름옷. 허 이것이 난가? 그래도 나름 잘생겼는데? 키킥. 그런데 그러고보니 저 편의점 직원 쏘아보는 눈초리가 누구를 많이 닮은거 같은데... 누구더라... 그래.. 현진... 허 그 녀석 본지가 20년은 더 된 것 같은데... 편의점 문에 달린 방울이 달랑거리며 잠시 회상에 빠진 사내를 끄집어내었다. 단발머리의 안경낀 여자가 들어섰다. 괜히 그 여자의 눈치를 보며 부랴부랴 요기나 채울량으로 검은 봉지안에 몇 개의 초콜릿을 쓸어넣었다. 

 사내는 편의점을 나와 쓰레기통주변을 서성거렸다. 초콜릿만으론 배를 채우기 어려워 혹 누가 버리고 간 빵조각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해서였다. 하지만 매서운 바람이 몰아붙여 더이상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에이구 썅~ 이 놈의 바람은 어디서 날라든거야. 남자는 매서운 바람을 피하려는 듯 조용히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빈자리가 못내 아쉬운 듯, 매서운 바람만이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