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야기를 들려줘..'(1)
비 오는 소리를 듣는다.. 안 듣는다.. 듣는다.. 비 오는 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다, 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지금 비오는 소리는 들리는가?
창 밖을 바라보니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들어맞은 듯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굳이 비 오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저 바깥 폭우의 생생한 현장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비 오는 소리는 들리는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동네가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한시간에 한대 정도의 버스가 다니는 곳이다. 다행히 얼마 전에 마을버스가 생겼지만 원하는 목적지까진 가지 않아 타기가 망설여진다. 무료환승을 할 순 있지만 그 내렸다 다시 올라타는 과정을 반복하기 싫어 고집스럽게도 오지 않아 야속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몇대의 마을버스를 그냥 지나쳐 보내고 드디어 기다리던 버스를 만났다. 탈까? 말까?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사람이 나타났을 때 기쁨보단 분노가 먼저 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버스가 왔을 때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화가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막연한 기다림이 내 분노를 대체할 수 없기에 난 이내 버스에 오른다. 버스 안은 역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제각각의 다양한 사람들. 이들은 나와 같이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을까? 아무리 내가 화를 내도 내게 생글생글 웃어주는 네가 있기에 난 가끔 나의 화난 얼굴이 궁금하다. 내 화난 얼굴도 저 사람들처럼 무표정하게 보이는 걸까?
오래도록 기다려서 만난 버스는 짧게 이별을 고했다. 더구나 뭐가 아쉬운지 시야에서도 서둘러 사라진다.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상관없어, 난 쿨하니까. 그래도 다음엔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줘. 막연한 기다림만큼 내게 고통스러운 형벌은 없으니까... 뭐가 그리 아쉬운지 떠나는 버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약속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소만 약속되어 있고 시간은 정해지지 않은, 그래서 날 더더욱 미치게 만드는...
약속시간을 처음부터 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는 매일 늦었고, 사정이 있었기에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았으며, 항상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나를 미치게 했다. 내 분노는 네게 보이지 않는건지 아무리 화를 내도 메아리마저 되돌아 오지 않았다. 결국 공허함만이 파고 들고 난 너를 버릴 수 없다. 애초 너와 나사이에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네 사전에 시간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고, 내 사전에 시간이란 단어가 나오는 페이지를 씹어 먹어버렸다. 괜찮아. 너를 떠날 수 없으니 한페이지 정도 망각하고 사는 건 일도 아닐테지. 단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페이지란게 기억이 남지만 말야. 아마 나는 기억이란 단어가 나오는 페이지도 우걱우걱 씹어먹어야 할까봐.
역시 넌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맘에 고집을 부려 한시간이나 늦게 나왔지만 너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린다. 너의 전화를 기다린다. 하지만 먼저 전화하는 것도 내 몫이다. 넌 전화하지 않는다. 아쉬운 건 나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나 역시 전화하지 않는다. 내 사전에 시간이란 단어는 사라졌기에 난 시간가는 줄 모른다. 시계 역시 보지 않는다. 의미없이 숫자만 바뀌는 화면은 날 지루하게 만든다. 그냥 나는 앉아있다. 기다리지 않는다. 난 앉아 있다.
시간은 모르지만 태양의 위치는 알 수 있다. 내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은 어느새 내 눈높이로 내려와 있다. 그 순간마저도 길지 않게 산등성이로 사라지려는 순간, 이유도 없이 그 산이 미치도록 미워진다. 너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좀 더 오래 만날 수 있었을텐데, 너만 없었더라면... 저기서 네가 온다. 오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표정은... 여유롭다, 웃고 있다... 나도 웃고 있다.
'병원에 갔었어. 그런데 생각보다 치료가 오래 걸리더라구. 아파서 혼났어.'
'전화? 너 전화 없길래 근처에서 잘 놀고 있는 줄 알았지. 그러는 넌 왜 전화 안했어?'
'화난 거야? 치료가 늦은 걸 어떻게 해? 내 탓도 아니잖아.'
'알았어, 알았어. 내가 맛있는거 사줄게. 빨리 가자.'
'우리!........ 헤.어.지.자.'